개혁신학과 개혁교회 신앙 정체성

 

 

 

 

조성재

 

 

 

 

1.      들어가는

 

한국교회가 침체 일로에 있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쉽게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의식은 기독교회의 양적 팽창이 지난 20 ~ 30 상황에 미치지 못하다는 현실의 반영인 하다. 여러 원인을 고안할 있겠다: 둔화된 인구 증가율, 기독교회(, 일부 대형교회 혹은 목회자) 윤리적 타락, 교권 정치적 이기주의, 가속화된 교회 세속화, 신학적- 기독교적 교회운동, 이단사설의 교회 침투 . 이로부터 외적 성장이 둔화된 것은 개신교 전체의 60% 차지하는 장로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 장로교회가 교회 위기를 교회 외연에만 연관짓고 있다면, 자체가 장로교회의 근본위기를 반증하는 것이 된다. 열거된 원인들 근저에 좀더 근원적이고 심각한 교회의 내적 위험을 간파해야 한다. 한국 장로교회가 외연에 치중하여 내적 위기를 인지하지 못하면 역사적 개혁교회의 반열에서 이탈하여 표류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개혁된 교회로서 한국 장로교회가 역사적 정통 개혁신학의 유산을 어느만큼 담지하고 있는가에 있다. 교회와 신학의 문제다.

 

고무적인 것은 최근 10여년 동안 역사적 정통 개혁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과 적지 않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개혁신학의 유산을 원전으로부터 연구,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개혁이라는 말이 이전에 없었던 새것을 창출하는 의미로 도용되는 것에서, 오래되고 확실한 하나님 말씀(오직 성경) 따라 사도들의 신앙가르침으로 돌아가는 역사적-공교회적 개혁 의미로 어느정도 교정되고 있는 같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개혁신학에 대한 관심과 신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혁신학의 교회법적 전통과 신앙고백 내용이 교회에까지 직접적이고도 빠르게 파급되고 있지 못하다. 개혁신학은 있으나 개혁교회가 많지 않은 형국이다. 개혁교회가 많지 않다는 말은 소속 교회의 역사적 신앙고백을 따라 신앙 정체성이 분명한 교인들이 많지 않다는 말이다. 의식화된 신앙을 가진 개혁교회 교인들이 그에 상응하는 만큼 양육되어야 한다. 현금 교회의 내적 위기는 성도 개인의 신앙고백이 공교회적 신앙고백서들에 일치하지 못하다는 것과 개혁신학이 교회의 신학으로써 봉사하지 못하는 데에 핵심이 있지 않나 말할 있다. 개혁신학이 교회의 신학으로 되지 못하며 교회는 신학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한국 개혁주의 장로교회는 내적 위기 상황을 향후 어떻게 대처해 나아가야 하는가? 본고에서는 이와 관련해 몇가지 내용을 정리해 개혁교회의 바른 신학적-신앙적 기조와 실천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우선 신학적인 면에서 개혁주의 장로교 신학의 특성을 다루고, 이어 실천신학적인 면에서 역사적 개혁신학의 유산이 어떤 방식으로 교회에 , 간접 영향을 미칠 있을지 전망해 것이다. 다만 내용적-시간적 한계를 고려하여 다루어지는 내용은 개혁교회의 신학과 신앙 정체성 확립의 단초를 도모하는 정도로 만족하고자 한다.

 

 

2. 신학적인 면에서

 

2.1. 역사적 개혁신학의 방법론적 전제

 

칼빈을 비롯해 장키우스, 우르시누스, 다네우스, 부카누스 당대 대표적인 개혁신학자들[1] 있어서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총화로 간주되었다. 하나님과 그를 아는 지식이 그들 신학의 원리 뿐만 아니라 내용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은 구원얻기에 충분하고 판명한 자기계시를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기록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을 유일한 길은 기록계시인 성경 외에 없다. 성경 없이 하나님을 바로 섬길 없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성경도 상상할 없다. 성경의 신적권위는 하나님의 특별섭리 방식을 전제한다. 인식 차원에서 성경은 유일한 신학원리지만,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이 성경에 앞선다. 하나님의 영의 영감을 따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개혁신학의 원리에서 하나님과 말씀을 구분하되 분리해서 생각할 없다. 둘은 종합적으로 고려되여야 한다. 성경론(de Scriptura) 다룰 성경의 참된 저자를 묻고, 신론(de Deo) 다룰 인식의 근거로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다루어진다.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요, 말씀은 하나님에 기원한다. 여기에 성경의 신적권위와 자체가신성(autopistie) 근거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도 이점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믿어야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시고) 책의 저자이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달려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는 수납되어야 하는데 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WM,1,4). 성경의 모든 속성이 참된 저자이신 하나님에 의존하듯이성경이 우리 마음 가운데 살아있는 말씀으로 수납되어지는 것도 성령의 내적사역에 의존한다. 성경은 내용의 고귀함, 교리의 효과, 문체의 장엄성, 모든 부분들의 일치성, 전체의 목표, 성경이 사람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온전한 발견, 그외 비교될 없는 많은 우월성 성경의 전체적인 완전성들은 성경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증거해 주는 논증들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권위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말씀에 의하여 그리고 말씀으로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사역에 달려 있다 (WM,1,5).

 

이러한 종합적인 이해는 근원적으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전통의 방법론적 배경을 두고 있다. 외부를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분리되지 않는다(opera Trinitatis ad extra non sunt divisa) 신중심적(theocentrisch) 사고가 정통개혁신학의 방법론적 배경을 제공해 준다. 이것으로부터 개혁신학에서 계시론은 신론적 관점에서 분리되지 않고,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전통에 따라 피조세계를 향한(ad creaturam) 삼위일체의 외적 사역으로 다루어 진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외적 사역의 비분리성은 상기 열거된 칼빈, 장키우스, 우르시누스, 다네우스, 부카누스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영향을 미친 제임스 어셔의 신학총론(A Body of Divinity)에서도 발견된다.

 

 

2.2. 역사적 개혁신학의 독특성을 나타내는 내용들

 

2.2.1. 신구약 성경의 통일적 경륜 - 언약의 통일성(sola & tota Scriptura)

 

삼위일체 하나님의 외적 사역은 위격들의 고유하게 분배된 사역은 있을지라도 분리된 사역은 아니다. 피조세계와 관계된 삼위일체의 모든 사역, 영원한 예정, 창조, 섭리, 구속, 심판은 위격들의 하나요 같은 사역이다. 세위격들은 위격의 고유성에 따라 분배된 사역들을 실행하지만, 사역들은 삼위일체의 의지의 통일적 경륜으로 교통한다. 따라서 구약이나 신약이나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경륜 아래 구원의 성취(in Christo) 구원의 서정(per Spiritum Sanctum)에서도 통일을 이룬다. 구원을 이루는 은혜언약의 궁극적 내용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차이가 없다. 율법시대와 복음시대의 차이는 언약의 집행방식에 따른 것이요, 언약의 본질적 차이는 아니다. 언약은 율법시대와 복음시대와는 다르게 집행되었고 율법 하에서 언약은 ...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든 것들에 의해서 집행되었고 ...(WM,7,5) 복음 아래에서 본체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을때에 ...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모든 족속들에게 더욱 온전하고 확증적이며 영적인 효과가 드러났는데 그것을 신약이라 부른다. 따라서 가지의 은혜 언약은 본질상 차이가 없으며 하나의 동일한 언약이 다른 세대에서 다르게 작용한 뿐이다 (WM,7,6).

 

 

2.2.2. 개혁교회 성찬교리의 배경이 되는 전그리스도(totus Christus) 그리스도의 전체(totum Christi) 논쟁 - extra calvinisticum

 

성찬논쟁은 종교개혁이후 루터파와 개혁파를 구별하는 주요 기준선이 되었다. 종교개혁 직후 개신교 진영 내에서는 이미 1519 1520 루터의 저작들이 출간되면서[2]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 몸에 대한 견해 차이가 보이기 시작했고, 1529 루터(공재설) 쯔빙글리(상징설) 논쟁을 통해 차이는 확고해졌다. 알려진대로 칼빈은 이들과 구별되는 영적임재설 견해를 견지했다.   

 

그러나 성찬논쟁 자체 보다 근원적으로 살펴야 것은 논쟁의 배경이 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이해다. 다시말해 성육신 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의 존재방식에 대한 이해에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문제를 두고 루터 이후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육체 내의 실제적인 통일성을 주장하되 육체밖에는 로고스가 없다 하였으나, 개혁파는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통일성(이성 일인격, totus Christus)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육체 밖의 로고스를 인정하는 입장이다. 개혁파의 입장은 삼위일체의 분배된 역사에 따라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에서의 신적 본성(divina natura) 삼위일체의 2위격이신 성자의 나누어질 없는 본질적 삼위일체의 신성(deitas) 모두를 고려하였던 것이다. 개혁파의 기독론적-삼위일체적 견해가 개혁파 성찬교리의 직접적인 근거가 된다.

 

루터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부활한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과 교류하여 실제적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부분 (totum Christi) 인성이 신성과 함께 세상 어디에나 편재하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몸은 로고스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어느 곳에나 편재하며, 성만찬시 그리스도의 편재하신 몸이 떡과 함께( 옆에, 아래에, 위에) 있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장면이나, 사도신경에서의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상징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개혁신학자들은 부활하신 전그리스도(totus Christus) 실제적으로 하늘에 승천하셨고, 성찬시 육체적이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임재를 주장하였다.

 

 

2.2.3. 예정론과 제한속죄 - 그리스도가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

 

1619 도르트레히트 총회에서 확정되고 1646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교리는 개혁교회의 주요한 가르침 하나다. 교리는 전성경(tota Scriptura) 어느 하나도 파괴됨이 없이 보존하려는 경건의 산물이다. 이런 이유로 예정론의 정확한 함의는 성경이 가르치는 예정교리 보아야 한다. 예정교리는 장로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일 뿐만 아니라 대륙의 모든 개혁교회들이 공유했던 가르침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장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를 다루고 있는데,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예정안에 구원의 방편과 적용도 포함시키고 있다(WM,3,3~6).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이전에 개혁교회 공적 신앙고백으로 정착되었던 내용이다. 다만 예정의 대상과 관련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창조될 중에 예정을 말하고, 도르트레히트 결정문에는 타락한 선택을 표현하므로 둘사이의 뉘앙스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전자를 타락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e) 후자를 타락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e) 이해한다.[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르는 장로교회의 입장은 도르트레히트 신조의 입장보다 조금 개혁된 예정교리를 받는 것으로 이해될 있다. 그렇다고해서 후자의 입장을 배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역사적 개혁교회의 공교회적 울타리로써 도르트레히트 신조는 최소한의 기준선을 제공해 준다.

 

이와 관련해 좀더 살펴보아야 논점은 예정교리에서 그리스도 속죄사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련된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의 문제다. 개혁신학 입장은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택자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고백한다.[4] 칼빈 시대에 알려져 있는 절충형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충분히 고통 받고 죽으셨으나 다만 효력에 있어서 택자에게만 유효하다는 것이다.[5] 그러나 이러한 절충형태를 칼빈은 그의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함이 아니요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주석에서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에서 문제제기를 하면서 말하기를, 그러나 여기서 바로 문제가 제기될 있으니, 모든 세상의 죄가 용서함을 받을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모든 유기자들과 심지어는 사탄까지라도 구원받을 있다고 구원 가능성을 확대하는 환상적인 우리들의 허황한 꿈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겠다. 그런 무도한 자들의 망설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 ... 왜냐하면 요한의 목적은 축복을 교회에 공통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라는 단어를 사도요한이 사용하였다 해서 그것 자체가 유기자까지 모두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며, 다만 모든 믿는 사람들과 지구 위의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그런 선택받은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6]

여기서 예정교리가 갖는 실천적 의미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예정교리를 신중히 다룰 것을 권면한다. 지극히 신비한 이러한 예정의 교리는 특별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취급을 해야 된다. 그렇다고 해서 교리를 침묵하거나 피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도의 구원의 확신과 위로의 근거가 된다고 밝힌다. 그렇게하므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유의하는 사람들은 그의 뜻에 복종을 함으로써 자신들이 효과적으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케 되고 자신들이 영원히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믿게 된다. 그러기에 교리는 신실하게 복음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하며 공경하는 일과 겸손, 근면 풍성한 위안에 관계된 모든 요소들을 제공하여 준다 (WM,3,8).

하나님의 예정교리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주어진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분이다. 우리가 성경을 따라 하나님을 창조주, 섭리주, 구속주, 심판주 등으로 아는 것처럼 같은 성경을 따라 하나님을 예정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교리의 핵심은 예정론을 아는가에 있지 않고 예정교리를 믿는자로 사는가에 있다. 열매가 보이지 않는 선교의 현장이나 극한의 삶에서도 말씀 사역자가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킬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보이지 않는 주의 교회가 있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삶의 고뇌 위에 주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고, 성도의 성도다움을 견지할 있게 되는 것에 예정교리의 실천적 의미가 있다.

 

2.2.4. 교회의 장로회 정치 - 그리스도의 열쇠는 믿는자 개인(uni)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 자체(unitati)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 논의과 결정이 도르트레히트 총회의 논의와 결정에 비해 좀더 개혁되었다 있는 것은 개혁교회의 실천신학적 측면이다. 특히 이전까지의 개혁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발전, 계승한 뿐만 아니라, 장외논쟁을 불사하고라도 에라스투스주의 회중주의와 구별되는 장로회 정치 모범을 개혁교회 틀로 확정한데 있다.

 
논쟁의 핵심은 교회의 열쇠가 누구에게 있는가에 있다( 16:18~19).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에라스투스주의와 회중주의(독립파) 각각 참여하였는데, 에라스투스주의는 천국열쇠가 관원에게 속한 것으로 주장하였고, 회중주의에서는 믿는자 대표로서 베드로 개인(unus)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회중 자체에 주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정은 두입장을 장로회 정치원리에 의해 거부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열쇠권은 사도를 대표한 베드로에게 주신 것이므로 사도회(unitas) 주어진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교회를 다스리고 치리하는 것은 장로회(목사 & 장로) 통해 이루어진다. 교회의 모든 일이 장로회주의에 따라 결정되고 실행된다. 장로회주의는 에라스투스주의보다 회중주의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알려진대로 녹스에 의해 꽃을 피웠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입장이 사무엘 러더포드를 중심으로 죠지 길레스피, 스티븐 마샬, 다니엘 코드레이 등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총회 당시 장외 논쟁을 불사하고 회중주의자들과 논쟁하였는데, 그러한 입장은 대륙 (특히 제네바를 중심으로) 개혁신학자들의 교회정치에 배경을 두었던 것으로 있다.

회중주의의 문제는 비단 교회정치체제에 국한 것은 아니었다. 근원적으로 당시 에라스투스주의 뿐만 아니라 회중주의 교회 지도자들의 신학 근저에 만연해 있던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소키니우스주의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되었다.[7]

 

 

2.2.5. 율법의 3 사용 - 율법의 도덕법적 사용

 

의식법으로써 율법의 1사용과 실정법으로써 율법의 2사용은 그리스도의 구속성취로 말미암아 폐지되었어도, 십계명과 같이 영원한 도덕법으로의 율법의 3사용은 여전히 구원받은 성도의 유효하다. 칼빈이 4계명 안식일 준수를 도덕법[8]으로 이해한 이래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된 날로 이해를 하게 되었다. Bound 안식일에 관한 논문에서 주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처럼 지켜져야 하며, 법은 도덕적이고 영원한 법이라 하여 주일을 세속화하는 스포츠나 오락게임을 버릴 것을 말하였다.[9] 이와 동일하게 William Gouge 사도행전 20 7,11절의 주석근거로 24시간 주일성수를 강조하였다.[10] 문제는 교회실천적인 면에서 조금 다루도록 하겠다.

 

 

3. 교회적인 면에서

 

3.1. 교회법상 교회와 신학의 관계

 

이상의 내용은 대략적인 소개이지만 역사적 개혁교회를 특징짓는 신앙고백서들, 신조, 요리문답들에 녹아져 있는 신학 입장들이다. 토대 위에 개혁된 교회로써 장로교회가 세워진다. 물론 상기 내용들은 신학교에서 신학후보생을 양육할 주로 논의될 내용들이다. 신학교에서 개혁신학의 독특성들이 얼마나 일관성있게 목회후보생들에게 전수되는지, 교과목에서 어느정도의 신학적 일관성이 확보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는 신학교의 방향성과 신학교수들의 신학적 입장의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앞서 현재 장로교회의 내적 위기를 여러 요인 하나로 교회와 신학이 분리된 현실에 주목했다. 개혁된 교회의 신앙이 신학에 반영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교회법적으로 네덜란드 개혁교단 하나인 기독개혁교회(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en, CGK) 교회와 신학 관계는 우리에게 좋은 예시가 있다. 몇가지 내용 우선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기독개혁교회 소속 아펠돈 신학대학(Theologische Universiteit Apeldoorn) 교수 임용 요건이다. 말씀 수종자로 별칭(dienaar des Woords)되는 신학교수 임용요건은 담임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emeritipredikanten) 중에 한하며, 그렇게 함으로 교회와의 연관성을 확립한다는 있다(Kerkorde, 2011, Art. 18).[11] 신학교를 말씀 수종드는 교육기관으로 유지하는 주체는 교회들(kerken)이며, 실행업무는 총회(generale synode) 의해 조정됨이 명시되어 있다(Art. 20). 교수임용 양식(Akte van aanstelling voor de hoogleraren aan de Theologiesche Universiteit)에는 총회가 교수 임명의 주체로 표기되어 있는데, 급여는 대학에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에서 정하며, 교수 은퇴 퇴직 수당이나 배우자 사망시 급여에 대해서도 총회가 총괄적으로 정한다고 나와있다(Bijlage 13). 따라서 신학교수는 목사와 마찬가지로 말씀 수종자로 교회를 섬기되 직무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신학교수들도 주일마다 개교회들을 순회하며 설교하는데, 원칙적으로 어느 지역교회-대부분 자신이 목회했던 교회- 소속되어 있는 경우에 한하여 가능하다

  신학적으로 교수들은 물론 강사들도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표방하는 세가지 신앙규범들, 네덜란드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도르트레히트 신조에 동의하고 서명 날인(door ondertekening)해야 한다(Art. 52; Bijlage 12).만일 세가지 신앙규범들에 불일치한 견해가 드러나면 이사회(curratorium) 사항을 충분히 알려 총회로 하여금 조사하도록 되어있다(Bijlage 12).  따라서 신학교수는 교회를 위한 말씀 수종자로서 개혁교회의 고유한 신학유산을 수호하는 자일 뿐만 아니라 목회자적 마인드를 가지고 목회후보생을 교육하는 교회선생이다. 이러한 교단 교회법적 시행규칙에 따라 아펠도른 신학대학은 어느 개인의 의견이 학교 운영을 좌우할 없게 되고, 교수들도 강조점의 차이들은 있을 있으나 거의 동일한 개혁교회의 신앙유산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를 통해 신학교육은 법적으로, 실제적으로 교회의 일이 되고 있다

 

기독개혁교회는 역사적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아니다. 그러나 장로회주의를 무시하지 않는다. 장로교는 하나의 교단 표명일 아니라 천국 열쇠가 사도의 (unitas) 주어졌다는 원칙에 따라 장로회주의를 표방한다. 장로회를 통해 다스려지고 치리되는 주님의 공회를 의미한다. 교회법적-실천적 면에서 (kerkenraad) 의한 치리원칙는 네덜란드 기독개혁교회의 개교회, 지역노회, 총회에 고루 반영되어 있다. 신학교도 교회법에 따라 총회에 의해 실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은 장로회주의의 신학적, 공교회적 모습을 회복해야 하는 한국 장로교회에 시사하는 크다.

 

 

3.2. 교회에서 예배질서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도르트레히트 총회 보다 좀더 개혁하였다 있는 하나는 장로회주의를 성경적 가르침으로 확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배와 삶의 엄숙함이었다 본다. 율법의 3사용은 후자에 중요한 원리를 제공했다. 실천적으로 장로교회의 내적 위기 긴급히 회복해야 사항들 많은 경우가 원리에 관련된다. 하나님의 날로써의 주일 성수 개념, 성경적 예배모범의 회복, 시편찬송의 예배 도입, 가정예배와 자녀들의 신앙교육 .

 

주일 성수 개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주일을 어떻게 사용해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안식일은 주께 나아가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사람들은 먼저 자기 마음을 충분히 준비하고, 종사하던 일상적인 일들을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나서 세속적인 직업과 오락에 관한 노동, 대화, 생각으로부터 하루종일 거룩한 안식을 지켜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적, 사적 행사, 그리고 불가피한 의무와 자선에 모든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WM 21,8)

 

찰스 1세가 칙령을 통해 순수 퓨리탄 운동을 핍박하기 위해 주일 오후 오락과 스포츠를 하도록 하였을때, 경건한 장로교 퓨리탄들은 24시간 주일성수 개념을 고수했다. 정신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반영된 것이라 있다. 그러나 우리시대 주일개념은 찰스 1세의 승리로 돌아간 같다.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이 주일을 구별하여 지키지 않고, 주일 오전예배 주일 오후에는 자유롭게 오락과 스포츠를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 주일은 거룩하고 구별된 날이기 보다 바쁜 일상 중에 쉬는 하루로 인식된 하다. 사도시대부터 지금까지 지켜 공교회적 전통이 사적 필요에 의해 지켜지지 않고 있다.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구별하여 드림으로 주께서 허락하신 모든 시간이 근원적으로 주님의 것임을 성도의 삶으로 확증해야 한다. 주일 성수 개념이 모호해 지면 예배도 타락하게 된다.

 

 

주일 예배 공교회적 회복

 

예배는 공회로 모인 모든 성도들이 약속된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모여 하나님께 올바르게 드려져야 한다. 예배의 대상이 없이 예배가 성립되지 못하고, 예배 집례자가 없이 바른 예배가 없는 것처럼, 공교회의 일원으로 특별한 사유없이 예배자리에 나아오지 않으면 예배는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못된다. 예배를 드리는 방식에 있어서도 자의적으로 드릴 없다. 사람의 (은혜를 가장한) 편리에 의해 고안된 예배는 우상숭배의 우를 범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적절한 방법은 그분 자신에 의해 제정되고, 그분 자신의 계시하신 뜻에 의해 제한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단의 제안을 따라 예배 받으시지 않으시고, 어떤 보이는 표현물이나 성경에서 규정하지 않은 어떤 다른 방식을 따라 예배 받으시지 않으신다(WM. 1,1) 고백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공적으로 드려야 하고, 모든 예배 요소가 성경을 따라 승인 받고 인정된 것들이어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어거스틴 전통에 따라, 개혁교회는 찬송에 있어서도 시편을 예배 내적 찬양으로 고집했다.

 

 

3.3. 교회와 가정에서 아이들 신앙교육

 

한국 교회에 익숙한 주일학교 체제는 유럽 개혁교회에 낯설다. 주일학교의 장점은 아이들의 높이에서 신앙을 전수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신앙의 계대를 이어 간다는 측면에서는 미약하다. 스마트폰, 게임에 중독되다시피 하고, 사교육 열병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들이 주일날 20~30분의 짧은 눈높이 신앙교육(설교) 통해 개혁교회 신앙인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유럽 개혁교회에서는 주일 예배 시간에 모든 성도가 아이들과 함께 가족단위로 모여 앉아 예배드린다. 6 이하 - 학교에서 알파벳을 아직 배우지 못한 - 아이들만 설교 직전 별도의 장소로 이동하여 눈높이 교육을 받는다. 6 이상 아이들은 주일 공예배에 함께 참석한다. 아이들은 연령에 맞게 나름 이해한 언어로 목회자의 설교를 요약한다. 그렇게 성도가 주일날 한자리에 모여 같은 찬송을 부르며 같은 선포를 듣는 그곳은 할아버지의 신앙이 아버지에서 손자로 신앙계대가 이어지는 복된 공간이다.

 

그러나 자녀의 신앙교육은 교회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된다.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개혁교회 성도들은 저녁 식사 함께 성경이나 요리문답을 읽는다. 가정의 목회자 격인 가장이 시간에 자녀들을 교훈한다. 한국 사회는 가족끼리 저녁 식사하는 일상을 빼앗겨 버렸다. 일상 가족이 함께 모여 성경교훈을 따라 대화할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앞선 신앙선배로서 부모는 자녀에게 신앙 유산을 전수해 주기 위해서는 함께 성경읽고 묵상하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3.4. 개혁교회 기독교 학교의 필요성

 

개혁교회에서의 신앙교육 뿐만 아니라 개혁신앙에 바탕을 학교에서의 신앙교육도 모색해야 한다. 현재 입시 위주의 교육시스템에서 신앙인을 길러내기에 거의 불가능하다. 주일 개념의 약화, 사교육 시장의 확장, 공교육의 교육철학 부재, 입시 위주의 결과주의 교육 . 이런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이 교회와 가정에서 받은 신앙 정신을 학교에서도 발현하고 이어갈 있을지 회의적이다. 아이들은 절대 다수의 시간을 입시위주의 교육 전쟁터에서 보내며 방치되고 있다. 개혁신앙의 가치와 철학에 바탕을 개혁교회의 학교기관이 필요하다. 한국의 입시 환경을 고려해 보면 - 교육 환경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구조가 동시적으로 풀려지지 않는한 - 지금으로서는 그런 기관설립이 얼마나 실현가능하고 유효할 예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개혁신앙을 표방하는 지역교회들은 다음 세대를 내다보고 학교기관 설립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가진 역량을 총동원하여 개혁주의 교육철학을 마련하고, 바탕 위에 ,장기적인 실천방안을 도모해야 한다

 

 

4. 나오는

 

이상 개혁신학의 특징과 교회의 신앙정체성에 관해 나름 열거해 보았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외면적인 보다 내면적인 것에 있다. 교인들의 신앙이 점차 개별화, 개인화, 상대화되어 가고 있다. 교회는 소비자에게 맞춤 서비스를 내어놓 , 사람이 편리한 방식대로 변화해 가고 있다. 기독교는 역사적이며 공적인 계시종교에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종교로 변모해 가고 있다. 신학과 신앙이 모호해져 가는 시대에 한국 개혁주의 장로교회는 신학과 신앙의 귀한 유산을 회복하여야겠다. 개혁된 신학 뿐만 아니라 개혁된 성도들이 많은 교회를 이루었으면 한다.

 

장로교회는 이미 개혁된 교회지만 전성경을 따라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 교회다. 개혁교회는 종교적 부패로 말미암아 개혁되지 못했던 교회에서 성경을 따라 바른 신앙이 회복된 역사적 공교회라는 사실을 첨언해 두고 싶다. 사도신경은 보편교회성을 믿음의 내용으로 고백하도록 한다. 개혁주의 장로교회는 그런 면에서 자신을 돌아보아 개혁된 교회의 신앙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되, 주변을 돌아보아 아직 개혁되지 못한 교회들에 대해 공교회적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개혁은 가시적 교회로 있는 지상의 모든 교회가 끝없이 감당해야 거룩한 교회의 시대적 사명이기 때문이다. 개혁은 어느 순간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는 해를 거듭하고 세대를 이어가면서 개혁된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하고, 구성원으로서 목회자요 신학자요 성도는 생으로 그것을 증명해야 것이다.



[1] 이들외 17세기 중반까지 대표적 개혁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Theodor Beza(1519-1605), J.J.Grynaeus, B.Copus, Pierre Biret(1511-1571), Guido de Bres(1522-1567), Petrus Dathenus(1532-1588), Caspar van der Heyden(1530-1586), Pierre de Cologne (Petrus Colonius, 1530-1571), Jean taffin, Herman Moded(1520-1603), Adrianus Saravia(1532-1613), Johannes a Lasco, F. Junius, Daniel de Dieu(1540-1607), Johanes Fontanus(1545-1615), Wernerus Helmichius(1551-1607), Petrus Matyr Vermiglius, Musculus, Petrus Boquinus(Pierre Bouquin), Casper Olevianus, Johann Heinrich Alsted(1588-1638), Heinricus Antonides Nerdenus(1546-1614), Johanes Maccovius(1588-1644), Rivetus, Festus Homnius, W. Amesius, Herman Ravensberger(1586-1625), Heinrich Alting(1583-1644), Samuel Maresius(1599-1673), Giberus Voetius(1588-1676), Georg Sohnius(1551-1589), Christoph Pezel, Mattius Martini, Lugwig Crocius, J,Jak. Grynaeus(1540-1617), Amandus Polanus(1561-1610), Thomas Cartwright, Walter Travers, Edgerton, Barber, Gardiner, John Fobes(1588-1638), John Knox, Andrew Melvil (헤르만 바빙크, 개혁주의 교의학Ⅰ, 김영규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 pp. 207-246).

[2] Ein Sermon von der hochw, Sacrament des Leichnams Christi und von den Bruderschaften, 1519; De Captiviate Babylonica Ecclesiae, 1520.

[3] 마치 타락 , 타락 선택설에 표현된 , 개념을 시간적으로 오해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supra infra 한국어로 오역한 기인하다. 보다 정확한 이해는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죄로 인한 타락를 고려하셨는지 여부(infra 혹은 supra)이다.

[4] 김영규, 17c 개혁신학, pp. 6-8.

[5] 칼빈. 요한일서 주석. 한철하외 공역, 성서교재사, 1995, p 195.

[6] 칼빈. 요한일서 주석, op. cit., pp. 193-194.

[7] 김영규. 17c, op. cit., pp. 11-13.

[8] 루터주의에서 성경을 율법과 대조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게 개혁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이후에도 여전히 율법이 복음과 동일하게 유익하며 삶의 규범으로 우리에게 남는다. 율법의 의식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하여졌어도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9]김영규. 17c, op. cit., p. 15; Cf. Daniel Neal, The History of the Puritans: or, Protestant nonconformists, London 1822, 262 ff..

[10] Ibid., p. 16.

[11] 문자적으로는 은퇴목사로 되어 있으나 내용적으로 보면 목회를 하다가 총회의 부름을 따라 교수직을 수행하기 위해 목회를 그만 두게된 목사를 의미한다.